하나님 나라의 바른 도리

by hun

사람이 성신님으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새사람이 이루어졌으면 성신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만을 온전히 의지함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한 가지 뜻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적어도 세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율법이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벌받는다.” 하고 위협해 가면서 형벌을 이야기하는 것과, 그 다음에 “이렇게 해야 너는 살 것이다”라고 지시하는 것이 또한 거기에 포함됩니다.

하지만 사실상 사람이 아무리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더라도 자기 속에 죄와 사망의 법이 있어서 자기를 잡아 가지고 원치 않는 데로 끌고 갑니다. 결국 사람이 율법을 준수하려고 자기가 각고면려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율법의 명하는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바른 도리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안 이루어도 좋으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가르친 바른 정신들을 죽 설명하셨지만 또한 그 정신으로 실천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할 때,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3절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하면서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생명의 성신의 법으로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새로운 법칙이 있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성신께 맡기고 의지하고 그리고 네가 그 문제에 대해서 깨달은 대로 자기를 의의 병기로 드려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의 죽은 몸을 살리시고, 너희를 향해서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주실 것이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오셨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통해 율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한 사람이 한 가지 겨우 지켜 보려고 애를 써 형식만을 지키고 내용은 못 지키고 하는 그런 귀 떨어진 것, 그런 불적인 준수라는 것은 결코 율법의 요구를 제대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신령한 ‘새로운 술’, 혹은 ‘새 옷감’으로 표시한 예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던 사람들이 갑지기 “의를 행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가는 일만은 내가 한 번 각고면려해서 이루어 보겠다”고 하면 그것이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계율주의의 구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듣고 나면 많은 경우 “참 좋은 말씀이고 귀한 말씀이고 옳은 말씀이다. 이제는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실천 생활을 해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실천 생활을 하겠느냐 할 때 자기에게 있는 선(善)의 의욕을 자기가 잘 진작해서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수가 많습니다. 자기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생명의 성신의 법이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한 그 은혜를 실지로 맛보고 살겠다” 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새로운 도리인데, 이 새로운 도리를 계율주의의 구태에 집어 넣어서 그것을 혼동하고 혼합해서 하나의 이론을 세운다면 그것은 아무런 지침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의지하고 살라는 말인가 아니면 성신의 능력을 의지하고 살라는 말인가?’ 여기에 대하여 이것도 의지하라고 하고 저것도 의지하라고 하면, 그런 이론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오.

이런 일들은 하나님 앞에 진실히 살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해 보아야겠다” 하면서 흔히 겪는 일입니다. 처음에 성신을 의지해서 승리의 생활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가는 거룩한 생활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모를 때는 대체로 자기가 절제하고 누르고 애를 써서 그렇게 하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신의 열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성신의 열매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그 하나씩 하나씩을 공부하고 노력해서 이루어야겠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국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통해 “이 새 술과 같이 굉장한 힘으로 팽창해 가는 신령하고 신선한 능력의 발휘가 구태의연한 형식에 꽉 잠겨 가지고 과거의 형식을 통해서라도 그대로 나타날 것 같으냐?”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사상과 그 내용, 신령한 생활의 지침, 그로 인한 생활들을 어떻게 구식의 계율주의의 여러 전통적인 행습을 통해 자꾸 나타내려고 한다는 말이냐? 옛날의 형식으로 눌러 놓고 그것으로 조절해 가면서 나아가려고 하느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사상과 제도와 또 새로운 생활이라는 것은 역시 새것에 합당한 옷을 입든지, 새것에 합당한 그릇을 쓰든지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교회의 자태는 새로운 여러 지침과 제도 하에서 거룩한 교회답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김홍전, “신령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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