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죄, 옛 사람과 새 사람, 그리고 신령한 생활

by hun

옛 사람과 새 사람

복음이라는 것에 대한 설명 가운데서 죄를 속하시는 예수님의 속죄의 공효라는 것이 어떻게 효과를 나에게 미쳤느냐 할 때, 죄의 형벌에서만 나를 건지시는 것이 아니라–엄격히 말하면 죄의 형벌이라는 것은 범죄한 사람이 계속적으로 범죄를 하고 범죄하는 상태에 그냥 방치되어 있는 것도 하나의 형벌이라고 그랬어요. 그러기 까닭에–형벌을 철저하게 완전히 면제해 주셨다면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책(罪責) 때문에 계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을 뿐 아니라 무서운 흑암 속에서 헤매는 것을 완전히 건져 주신다는 확실한 사실이 있는 까닭에, 현실적으로 죄의 권세가 나를 지배해서 어둠과 고통과 또 하나님을 반역하는 길로 질질 끌고 나가는 죄의 세력의 악한 작용의 모든 관계에서 나를 건져 주신다는 사실이 거기 있다 그것이오.

이렇게 죄의 힘에서 건져 주심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거기 기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건 죄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느냐 할 때에는 물론 사람의 속에 있는 죄의 근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죄의 근성이라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죄라고 보는 것이, 그 사람 속에서 그 사람의 마음에 어떠한 선이나 충성이나 의를 좇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그것은 행치 못하게 하고 원치 않는 저것은 행하게 한다는 무서운 맹위를, 폭위를 발휘한다는 것을 우리가 또한 배웠어요. 이것이 로마서 7장에서 주로 논한 말씀이올시다. 이렇게 해서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지랴’ 하고 바울 선생은 자기가 관찰컨대 `거기에 하나의 법칙이 있다. 그건 죄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하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그로 인하여서 자기 속에 죄를 짓고자 하는 요구가 있고, 또 과거에 죄를 지어 버릇해서 거기에 아주 적응하게 되어 있는 자기의 습성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건 또한 기본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도덕적인 성격 가운데 딱 자리를 잡고서 늘 맹위를 떨치는 것인데, 이런 부패한 인간의 성품, 이걸 가리켜서 옛 사람이라는 말로 로마서 6장 6절에는 표현했어요. 사람–사람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이냐 하면 옛 사람이다 했어요. 그리고 이 옛 사람이라는 것은 항상 우리에게 있어서는 경계를 해야 할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친 것이올시다.

거기에 또한 대조해서 성경에는 새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 같으면 옛사람 · 새사람 하고 둘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옛사람 · 새사람이라는 두 가지의 현저한 다른 실체가 움직인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올시다. 오늘 읽은 이 말씀 가운데도 보면 에베소서 4장 22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여기도 옛 사람이라는 말이 있어요–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기도 옛사람 · 새사람이라는 말이 확실히 대조되어 있습니다…

옛날의 나쁜 습관을 옛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님

…그 옛사람이라는 것이,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런 것 보면, 옛날에 믿지 아니했을 때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금 늘 당연지사라고 좇아가고 있는 여러 생활 습관이나 여러 사상이나 감정이나 등등이 필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한 인간적인 품성을 발휘케 하는데, 그런 품성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습관이나 사상이나 감정 등을 그대로 자기도 베껴서(copy) 자연스럽게 그대로 발휘하면, 그것은 특별히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없이 자연히 사회의 물결 속에서는 그 물을 먹고 그 물을 토하고 사는 까닭에 그대로 들어보면 그것은 옛사람이 나오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오.

옛사람 가운데 있어서는 위대한 사람도 있어요. 또 도덕적으로 훨씬 선한 사람도 있어요. 세상의 안 믿는 사람도 의를 위해서 자기가 일신을 내버리는 사람도 있고 생명을 바치는 사람도 있고 또 노심초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오. 의가 충천하고 진리를 좇는 사람, 또 거룩한 것을 늘 찾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올시다. 그런 사람들은 옛사람이 아니고 새사람이냐 하면 소용이 없는 이야기요. 다 옛사람이오.

그런 점으로 볼 때, 옛사람 · 새사람의 구별은 사람이 개과천선을 해서 허물과 죄를 버리고 선과 의를 좇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해요. 옛사람은 구습을 좇기는 좇아간다. 구습을 좇아 안가면 옛사람 아니다는 것은 아니오.

그렇기 까닭에 `옛사람과 새사람의 경계는 무엇으로 따지느냐?’ 하는 거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말씀을 주의하세요. 새사람은 새로 지으심을 받아야 새사람이지, 새로 창조함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새사람이 아니다 하는 거요…

예수님의 새 생명이 발휘되는 인격을 새사람이라고 함

새 창조, 재창조에서 필연적으로 조성해 놓는 사람이라야 새사람이지, 재창조라는 사실이 없고 새사람만 지어지지도 아니하는 것이고, 새사람을 안지었는데 옛사람이 악에서 조금 악을 덜 하고 선을 좀더 많이 했다고 혹은 대단히 상당히 대전환을 해서 상당히 악하던 사람이 그 모든 악을 포기하고 상당히 전향을 해서 선을 행하고 의를 향해 간다고 그것을 보고 새사람이라고 하지는 아니한다 그 말씀이오. 그러기 까닭에 성경에서 옛사람 · 새사람 할 때는 그 경계선은 새로 지은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는 것이올시다.

그러면 우리가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 하는 사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함을 받은 사람, 그 사람이 곧 또한 새사람을 가지는 것이다 하는 것은 성경에서 가르친 것을 여러분 잘 아시지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새로 창조를 받은 것이다–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인데…

예수님의 새 생명을 받고 거듭났다고 해서 바로 새 사람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님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함을 받았으면 곧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냐 하면 새로 창조함을 받은 그것만으로 그는 자동적으로 언제든지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는 안된다 그 말이오. 여기 에베소의 이 편지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올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버려라 하는 명령이오–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4) 골로새서는 “입었으니” 하는 과거사를 썼지만, 에베소서는 “해라” 하고 명령하신 것이오. 그러면 이것은 예수 믿을 때 자동적으로 사람이 스스로 만들지 아니한, 하나님께서 오직 그 대권과 능력으로서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데서 이루신 그 재창조 곧, 중생(重生, 거듭남)이라는 사실, 그것 자체가 새사람을 입었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입어야 한다 하는 것이올시다…

…중생의 사실은 영원한 생명의 사실인 까닭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터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저를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해서 영생의 확보라는 것이 분명히 있지마는, 새사람의 사실이라는 것은 때를 따라서 옛사람을 다시 입고 나오고 새사람을 지지 눌러 버려서, 예수를 믿고 중생한 기록이 있다 하나 참된 생명이 속에 있는 것 같은 확실한 표현이 없이, 구습을 좇는 이 세상 사람과 같은 식의 생각을 하고 같은 감정을 품고 같이 나가고 다만 기독 종교 하나만이 자기에게 의식적으로 항상 지배하고 있다는 정도의 생활을 하는 것이 참 많은 것이올시다.

새 사람의 몇 가지 자태

새사람이 어떤 모습이냐라는 것은 결국은 그 새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상적인 것, 그 목적이라는 것, 그걸 먼저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오. 새사람이 갖고 있는 목적은 무엇인고 하니, 작게는 무엇보다도 자기 부인(否認)에 있는 것이오. 소극적으로 첫째는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데 새사람이 있는 것이오. 자기를 시인하는 새사람이란 세상에 존재 않는 것이오. 자기를 시인하고 있는 동안 새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인 줄 알아야 하는 것이오.

언제든지 자기를 시인하고, 자기의 행복이라는 것과 일단 유사할 것 같으면 자기의 행복이 먼저 앞선다는 이런 정신; 이건 속에 `자기’라는 게 딱 서있는 까닭에 그런거요. 평소에 아무리 유순하고 좋고 맘이 좋고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과 같이 뵐지라도–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선의 하나인 까닭에 그걸 나쁘다고 말할 수 없어요. 사회 생활하는데 사람이 품성이 좋고 조화 있고 하는 것이 좋긴 좋습니다만–그것을 그리스도교에서 덕이다고 따지지 않는다 그 말이오. 그럴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덕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있는가?’ (자기라고 하는 생각이 없는가) 즉, 문제가 있을 때 자기 행복이 먼저 앞서는가 아니면 주님의 나라의 일이라는 게 제일 먼저 자연스럽게 앞서는 정신이 딱 생기는가, 그것이 첫째 중요한 문제인 것이오…

옛사람이라든지 새사람이라든지 하는 것이 공허한 이야기가 아니고, 참으로 생활 가운데서 그가 완전히 자기를 부인한 생활을 하는 데서만, 철저히 자기를 포기해 버리고 주께 전부를 바치고 나가겠다는 이 생각을 하는 데서만 비로소 깨달아질 수 있는 문제올시다. 그렇지 아니하고 덮어놓고 기분 좋게 새사람 노릇하려고 하면, 글쎄 기분 좋을른지는 모르지만 이게 새사람이라는 사실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이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새사람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는 것이 뭐냐, 요소라는 게 뭐냐 하면 첫째, 새사람은 새사람인 까닭에 자기를 의식하는 옛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말이오. 그와는 반대라 말이오. 옛사람은 뭐냐 하면 궁극적으로 자기(自己)라는 것을 의식하고 자기 ego라는 것을 앞세우는 것이오. 항상 아상(我相)이라 하는 말로 썼는데, 아상이라든지 아만(我慢)이라는 것이 딱 서는 것이오. 그래서 의외에도 자기라는 것을 늘 의식하고 자기의 명예를 늘 생각하고 자기 일에 대해 누가 조금이라도 명예를 훼손하는 것인가 할 때는 곧 자기 자신이 거기에 반격을 하려고 하고 그 일에 대해서 곧 반응을 일으키고, 이 자기라는 것이 아주 강하게 움직인다는 것이 이게 옛사람이라는 것이올시다. 새사람이라는 것은 뭐 맹충이 같이 누가 욕을 하더라도 아무 말도 않고 아무 반응이 없느냐? 그건 아니오. 문제는 항상 강렬한 새로운 반응 하나가 움직이는 것이오.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것이 무엇 되느냐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이오. 누가 나를 욕하면 `나 욕한 것이, 내 명예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 보통 흔히 있는 일이올시다. 아주 명예심이 강한 사람에게, 옛사람이 강하게 있는 사람에게 특별히 있는 것이오. 그러나 자기가 욕을 먹었을 때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께는 무엇이 돌아가는가?’ 먼저 예수님께 죄송한 생각이 나던가 예수님 앞에 당황한 마음이 생기든지, 이것이 있는가 없는가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는 뭐가 되는가’. 이런 것들은 조그마한 예올시다마는, 이제 이 옛사람 · 새사람의 구별,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명백하게 알아가지고 `어떻게 된 것이 옛 사람인가? 어떻게 된 것이 새 사람인가?’ 분별해야겠습니다.

신령한 생활은 새사람으로 사는 것

오늘 우리가 이야기한 것은 사람이 어떤 악에서 벗어나서 선을 행하고 선을 지향하고 나가면 새사람이냐 하면 그런 건 새사람 아니다는 것이오. 또 사람이 가령, 비교적 자기 자신을 반성을 하고 교만하다가 겸손하게 되면 옛사람이 없어지고 새사람이 들어온 까닭에 그러냐 하면 그런 것 상관 없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도 교만하다가 겸손하게 되고, 또 유교의 도덕 가운데도 겸손이라는 것을 아주 큰 덕으로 가르치는 것이오. 이게 그래서 사람이 자기 명예에 대해서도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溫)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라’, 사람이 나를 몰라준다고 내가 그렇다고 해서 성내지 않는다면 그거야 군자다 그래서 아주 원덕으로서의 사람은 자기 의식을 너무 강하게 가진다는 것 좋은 것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 것 보면 이건 유교의 도덕이라는 것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다 생각하는 도덕이오. 새사람이라는 게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거요. 그러면 어디에 있느냐 할 때, 가령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상이 없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새사람이라는 것은 성신의 충만한 능력 가운데서 그리스도적인 품성으로 주를 사랑하는 심정이 마음 가운데 강하게 지배하는 생활이 되는 것이다 그거요. 그런 생활을 드러내는 자기 기본 품성이 하나 있다 할 때 그건 새사람이니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령한 생활이라고 하고, 또한 신령한 자라 말할 때는 새사람이 그렇게 늘 지배하는 사람이란 말이오.

– 김홍전, “신령한 생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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